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슈빌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12월 16일 밤, 후드의 패잔병들은 프랭클린으로 남하하였다. 12월 18일 포레스트 휘하 2개 기병사단이 합류하면서 물자도 부족하던 윌슨의 북군 기병대는 추격을 멈추어야만 했다. 남군은 덕 강(Duck River)을 건너 후퇴하면서 다리를 불태웠고, 북군 보병은 토머스가 배다리를 남군의 퇴로인 프랭클린 쪽이 아니라 머프리즈버러 쪽으로 보내는 바람에 12월 23일에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포레스트가 남군을 계속해 추격하는 윌슨의 기병대를 가로악으면서 몇 번의 작은 교전이 발생했지만, 후드는 결국 12월 28일 테네시 강에 설치된 배다리를 건너 후퇴했다. 토머스는 해군이 테네시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후드를 차단해주기를 요청했지만, 낮은 수위와 남군의 포격 때문에 해군 역시 후드를 막지 못했고, 토머스가 파견한 스티드먼의 임시 분견대 역시 배다리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테네시군은 프랭클린-내슈빌 전역 초기 포레스트의 기병군단을 제외하고도 약 38,000명의 군세였지만, 프랭클린과 내슈빌에서의 참패, 그리고 연이은 탈영으로 15,000명 이하로 쪼그라들어 사실상 궤멸되었다. 후드는 전역의 실패를 부하들과 병사들의 탓으로 돌렸지만, 그는 1865년 1월 13일 테네시군 지휘권을 내려놓았고, 다시는 야전 지휘관을 맡지 못했다. 서부전선에서의 테네시군의 괴멸은 서부전선 남군의 사실상 종말을 의미했다. 이후 테네시군 잔여 병력은 캐롤라이나로 이동하여 조셉 E. 존스턴 휘하에서 셔먼을 막는 데 투입되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고, 로버트 E. 리의 항복 이후 존스턴과 함께 셔먼에게 항복했다. 한편, 테네시군까지 떠나면서 앨라배마와 미시시피는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윌슨은 기병대만으로 테네시부터 앨라배마, 조지아까지 휩쓸며 앨라배마의 주도 몽고메리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앨라배마의 주요 항구도시 모빌 또한 북부 육해군 합동작전으로 함락되면서 딥 사우스 일대까지도 연방군의 통제 아래에 들어갔다. 윌슨 휘하 기병대는 이후 도주하던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사로잡기도 했다. [[분류:1864년 전투]][[분류:남북전쟁/전투]][[분류:지상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